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이로 회담 (문단 편집) === 11월 26일 === [[파일:external/image.chosun.com/2015080402162_0.jpg]] 이날 촬영된 공식 사진, 왼쪽부터 장제스, 루스벨트, 처칠, 쑹메이링.[* 인쇄용 사진이다보니 화질이 떨어지고 덧칠을 하였다.] 이날의 공식 일정은 오전 11시 30분 장제스 숙소에서 장제스와 미국 장성들의 회의, 메나하우스에서 미영 회의, 정오에 장제스와 어니스트 킹 제독의 오찬회동, 2시 반에 메나하우스에서 미영 연합참모회의, 4시 반에 루스벨트 숙소에서 미영중 정상회의, 8시에 장제스 숙소에서 장제스, 홉킨스의 만찬회동이었다. 아침에 장제스는 헨리 아놀드 장군과 회담하여 한달에 1만톤의 공수물자가 필요하며 총공격이 전개될 때 남부 버마에 연합군을 상륙시킨다는 확약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11시에 장제스가 연합군 조종사들을 만나는 동안 쑹메이링은 그 자리를 빠져나와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났고, 그에게 10억 달러의 차관을 요청했다. 루스벨트가 너무 선선히 수락하자 장제스 부부는 무척이나 기뻐했고 오후 3시에 루스벨트를 다시 찾아 감사를 표했으며 외몽골과 티베트 문제, 버마 수륙공동작전을 논의했다. 오후 3시 반에 윌리엄 해리먼 주 소련 미국 대사, 영국의 앤서니 이든과 알렉산더 캐도건, 중국의 왕충후이가 한자리에 모여 선언문 채택을 위한 토론에 들어갔다. 캐도건은 해리만이 영국 측의 개정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것 같다고 썼다. 4시에 처칠이 보낸 수정안이 도착함으로 해리만과 캐도건은 수정안이 통과되었다. 영국은 초안 원안 첫째 단락의 '군사장관'이란 표현의 수정, 수정안 셋째 단락의 '중국에 영토를 반환한다'는 대목을 '일본이 당연히 포기해야 한다', 초안 원안 다섯째 단락의 '(한국이) 하나의 자유롭고 독립된 나라가 되도록 한다'는 것은 '일본의 통치에서 벗어나도록 한다', 초안 원안 다섯째 단락 아래 부분의 '우리의 작전은 일본의 침략을 제지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스스로 조금도 바라는 바가 없으며 영토 확장의 뜻도 없다.'는 문구 추가를 요청했다. 중국은 첫 번째와 네 번째 요구는 받아들였으나 두 번째와 세 번째에 대해서는 영국과 대립했다. 영국의 주장에 왕충후이는 '원래 문장이 좋다'며 적극적으로 반대했고 결국 이것은 원안대로 가기로 하였다. 비슷한 시간, 루스벨트 숙소에서 선언문 채택을 위한 마지막 정상회의가 열렸다. 이미 합의된 선언문을 가지고 모인 정상들은 합의된 선언문을 한번 낭독한 후 통과시키기로 결정함으로 카이로 회담이 확정되었다. 앤서니 이든이 초안을 읽었고 각국의 지도자들이 이를 구두로 인가했으며 스탈린에게 내용을 알리기 전까지 선언을 공표하지 않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날 저녁 확정된 카이로 선언이 각국에 전달되었고 공포일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일정이 잡히지 않았으나 각국이 같은날 동시에 발표하며 발표 전에 각국에 통지하기로 한 것은 합의되었다.[* 하지만 발표 32시간 전 로이터 통신이 카이로 선언의 내용을 폭로했다 한다.] 구체적 일정이 잡히지 못한 이유는 스탈린의 협의를 거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1월 30일 스탈린은 카이로 선언에 대해 동의하였고 12월 1일 발표되게 된다. 장제스는 쑹메이링에게 최고의 공을 돌리며 아내를 극찬했다. >"오늘 11시에 경제 문제로 루스벨트 대통령을 방문한 후, [[쑹메이링|여사]]는 홉킨스가 떠날 때까지 열 시간 동안 거의 한순간도 쉬지 못했다. 또한 열 시간 동안 매 순간 극도의 긴장을 유지하면서 단 한 마디도 실수하지 않으려고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때문에 10시에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이처럼 녹초가 된 걸 본 적이 없다. >---- >1943년 11월 26일 장제스의 일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